[기자의눈] 익명성에 숨은 '키보드 워리어' 판사들
[기자의눈] 익명성에 숨은 '키보드 워리어' 판사들
  • 신평택신문
  • 승인 2021.02.11 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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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1) 이장호 기자 = 우리나라 헌법이 제정된 이후 '사법파동'이라고 불리는 일들이 여러 차례 있었다. 그때마다 일선의 판사들은 자신의 이름을 걸고 적극 의견을 표명했고 그런 행동들이 결과적으로 사법부 발전을 이끌어왔다.

1971년 7월 검찰이 판사들에 대한 구속영장을 신청하자 전국의 판사 150여명이 사표를 냈다. 1988년에는 소장판사 335명이 '새로운 대법원 구성에 즈음한 우리들의 견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김용철 당시 대법원장의 사퇴 등을 요구했다.

1993년 6월 서울민사지법 단독판사들이 '사법부 개혁에 관한 건의문'을 발표했다. 2003년에는 이용구 당시 서울지법 북부지원 판사가 법원 내부 게시판에 올린 '대법관 제청에 관한 소장 법관들의 의견'이라는 글에 159명의 판사가 서명하기도 했다.

2009년에는 촛불집회 관련 사건에 서울중앙지법원장이던 신영철 대법관의 재판 개입 행위에 항의하며 각 법원에서 단독판사 회의를 열기도 했다.

대학 때 법학을 공부하면서 이런 판사들의 결기있는 모습에 감명을 받기도 했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소신을 밝힌다는 것은 현재도 어렵겠지만 과거 권위주의 정부 시절에는 더더욱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기자가 된 후부터 본 판사들의 모습은 인터넷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익명의 누리꾼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사법행정권 남용 사태가 터지자 법원 내부망 '코트넷'의 익명 게시판에는 판사들이 썼다고 생각되지 않은 포털사이트 댓글에서나 볼 수 있는 글들이 올라왔다.

이견이 있는 판사들은 서로 비꼬아 공격하고,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향해 '양승태씨'라고 표현한 글들이 몇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과연 그 글을 쓴 판사는 양 전 대법원장 앞에서도 '양승태씨'라고 이야기할 수 있었을까.

이번 김명수 대법원장의 거짓해명 사태 때도 마찬가지 모습이었다. 포털사이트 판사들의 익명 게시판 '이판사판'에는 김 대법원장을 비난하는 익명의 글과 댓글들이 넘쳐났다.

이판사판에는 "대법원장 민낯을 보았다는 게 충격", "대법원장님은 '쏘리' 한마디 하고 발 뻗고 주무셨습니까", "지금이 정녕 양승태 대법원장님 시절보다 더 정치세력에서 독립됐고 인사는 더 공정해졌다고 말할 수 있겠냐"는 등의 글들이 올라왔다.

실명으로 '코트넷'에 올라온 글은 정욱도 대구지법 부장판사의 '지금 누가 정치를 하고 있습니까'란 제목의 글과 윤종구 서울고법 부장판사의 "'사법부'는 현실, 결과, 영향만을 따르지 않는다는 점에서 '입법부'와 다르다"는 글 정도다.

이번 '거짓해명' 관련해 판사들이 단체행동을 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판사들이 올바르지 못한 일들이 사법부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다면 본인의 이름을 걸고 말할 수 있는 용기 정도는 갖고 있어야 하지 않냐는 것이다.

판사들은 일반 직장인들과 다르게 퇴직 후에도 자신들을 모셔갈 로펌들과 기업들, 대학들이 있다. 변호사로 개업도 할 수 있다. 물론 모든 판사들이 퇴직 후 좋은 대접을 받는 곳으로 이직을 쉽게 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일반 직장인에 비해 선택의 폭이 매우 넓은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다.

판사들이 어쩌다 익명성에 숨게 된 것일까. 판사들이 일반 직장인들처럼 법원을 단순한 직장처럼 느끼는 탓일까. 판사들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쓴 글에 논리적인 갑론을박을 벌이는 모습은 더이상 보기 어려운 걸까. 어릴 적 감동 깊게 봤던 판사들의 결기 있는 모습은 앞으로 볼 수 없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