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종 칼럼] 야만시대의 미얀마 사람들
[김수종 칼럼] 야만시대의 미얀마 사람들
  • 신평택신문
  • 승인 2021.04.19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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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1


(서울=뉴스1) = 한국서 미얀마까지는 3500㎞나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러나 지금 미얀마인과 한국인 사이 마음의 거리는 1㎞도 안 되는 것 같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외치며 군사 쿠데타에 목숨의 위험을 안고 항거하는 미얀마 사람들에게 연대감을 느끼는 한국인의 목소리가 곳곳에서 울려나오고 있디.

광주를 비롯해서 전국 지자체들이 미얀마 유혈사태를 규탄하고 유엔의 지원을 촉구하는 성명을 내는가 하면, 수많은 종교 및 시민사회단체가 모금운동을 벌이자 1만 원, 2만 원, 3만 원, 5만 원,10만 원씩 미얀마돕기 계좌에 입금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민주화를 위해 궐기했던 동병상련의 마음이다. 자유와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몸으로 부딪치며 느꼈던 한국인들의 연대감이 미얀마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와 희망을 주고 있다고 한다.

지난 2월 1일 민주통치를 중지시킨 군부 쿠데타 이후 미얀마의 봄은 연일 피로 얼룩지고 있다. 군부의 통제속에 언론의 취재가 극도로 제한된 미얀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는 소상히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외신이 보도하는 참상은 가히 야만적이다. 지금까지 550여 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어린이 40여 명을 포함하여 직접 데모에 참가하지 않은 사람들도 군과 경찰의 총탄에 피흘리며 쓰러졌다. 군인들은 총탄 증거를 없애기 위해 희생자 시신을 불태워 훼손하기까지 했다.

보안군들이 집에 쳐들어가 시위 혐의자를 내놓으라며 가족을 고문했다. 데모를 하는 이모를 향해 "왜 거리에서 외치느냐"고 말하는 순진한 10세 소녀가 마을에 쳐들어온 군인의 총에 관자놀이를 맞고 죽었다. 이렇게 무시무시한 공포분위기 속에서도 "내 아이의 미래를 위해 죽겠다"며 민주주의를 외치고 데모하는 젊은 엄마들 이야기가 비장하면서 안타깝다.

군부의 시위 진압이 난폭해지고 장기화되면서 미얀마 사회에는 두 가지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사무실에 출근하지 않거나 일을 하지 않는 불복종 운동이 공무원과 은행원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다. 또 많은 시위자들이 군경의 위협으로 산속으로 내몰리면서 총기 훈련을 받으며 게릴라 전으로 군부에 맞설 준비를 하고 있다. 로힝야 등 100여 개의 소수민족으로 이루어진 미얀마는 내전의 위험성도 높아지고 있다니 또 다른 비극이 싹트고 있는 셈이다.

미얀마는 '버마'라는 이름으로 60년대 70년대를 살았던 한국인에게 적지 않은 기억을 남겼다. 영화 '콰이강의 다리'에서 버마의 정글을 보며 한국의 민둥산과 비교했고, 이 나라가 영국과 일본으로부터 시련을 당했던 것을 알았다. 차범근 시대의 한국 축구가 '몽몽틴' '몽위몽' 등 이상한 이름을 가진 버마 대표팀 선수들의 기민한 활약에 쩔쩔매던 기억이 새롭다. 두 나라 다 같이 군부독재가 지배하는 권위주의 정권이었던 시대였지만 버마는 한국과 비교해서 뒤지지 않은 나라라는 인상이 강했다. 한국의 발빠른 경제성장으로 잊혀지던 버마가 한국인의 뇌리를 때린 것은 1983년 한국 대통령 방문을 노려 북한이 설치한 폭탄이 터져 다수 각료를 포함한 한국 정부 요인 17명이 사망한 아웅산테러 사건이다.

과거 미얀마는 영국의 식민통치를 받아서인지 일찍이 문민통치를 시작하여 민주주의를 잘 할 만한 나라로 보였다. 3대 유엔사무총장이 미얀마인 우 탄트였다. 많은 새 독립국가가 탄생하던 10년간(1961~1971) 우 탄트는 유엔의 수장으로 재임했다. 당시 개발도상국 사이에서 유엔에 대한 기대와 권위가 높았다. 특히 유엔군 파견으로 6·25전쟁을 치렀으면서도 유엔 회원국이 못 됐던 한국에서는 '유엔의 날'을 공휴일로 기념할 정도로 동경이 컸기에 우 탄트는 경이로운 존재였다.

우 탄트 유엔총장은 쿠바 위기 때 미국 케네디대통령과 소련의 흐르쵸프 서기장의 정상회담을 주선해서 위기를 푸는 데 역할을 했지만,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을 비판했다. 20세기 말 개발도상국의 경제발전 문제에 힘을 쏟았던 유엔개발계획(UNDP), 21세기 기후변화 문제해결을 주도하는 유엔환경계획(UNEP)은 그가 총장 때 설립한 기구다. 유엔 역사상 가장 활발했던 사무총장이 아마 우 탄트일 것이다.

1962년 군사쿠데타 이전 민간 정부의 외무장관을 지냈던 우 탄트는 국제사회의 신망을 얻었을 뿐 아니라 미얀마인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이런 탓일까. 네윈 군사정권은 노골적으로 그를 견제했고, 그가 1974년 사망한 후 학생들이 주도한 추모집회를 폭력적으로 막으면서 수많은 시민이 희생되었다.

시대적 조류나 국제적 역할에 비추어 볼 때 미얀마는 60년 장기 군부 독재정치가 어울리지 않는 나라다. 국가 내 특정한 세력의 집단이해가 권력DNA 속에 녹아들어갈 때 국가조직이 얼마나 국민들에게 무서운 폭력적 존재가 되는지를 미얀마 사태가 여실히 보여준다. 아웅산 수치가 미얀마 민주화에 투신한 것이 30년이 넘었다. 선거에 의해 절대적인 지지를 받은 아웅산 수치가 가택연금, 구금 등 온갖 박해를 받으면서 군부와 동거했던 것은 미얀마 권력세계의 현실을 반영했던 것일까.

지난 해 11월 치러진 총선에서 아웅산 수치가 이끄는 '국민민주주의연맹'이 대승을 거두자 아웅 플라잉 육군참모총장이 2월 1일 쿠데타를 일으켜 계엄령을 선포하고 전권을 장악한 다음 아웅산수치를 비롯하여 정치인들을 체포 감금하고, 이에 항의하는 시민들을 탄압하고 있다.

미얀마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찾을 수 있을까. 미얀마 사람들이 기대하는 건 국제사회의 여론과 유엔의 개입이다. 미얀마 군사정권에 실질적인 압력이 가해지려면 유엔안전보장 이사회가 결의안을 통해 유엔 평화군 파견이나 군사정권에 대한 제재를 가해야 한다. 하지만 미얀마인들에겐 불행스럽게도 국제사회는 분열되어 있다.

미국은 미얀마 군부의 쿠데타에 반대하고 특히 바이든 정부는 안보리 결의를 통해 인권을 탄압하는 미얀마 군부에 압력을 가하고 싶어한다. 영국과 프랑스도 같은 생각이다. 그러나 중국과 러시아가 안보리 결의를 반대하고 있다.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질서에 도전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미국은 독자적으로 미얀마에 제재를 가하고 있는 반면, 중국의 외교부장은 공공연히 미얀마를 찾아가 군부의 손을 들어주기까지 했다. 미얀마는 중국과 미국 사이에 벌어지는 신냉전(제2차냉전)의 충돌지점이 되고 있다.

미얀마는 인구가 한국과 비슷하고 국토가 6배나 넓은 나라이지만 1인당 국민소득은 1245달러 밖에 안 되는 빈국이다. 20세기 한때 필리핀과 더불어 동남아의 기대주로 한국인의 기억에 다가왔던 미얀마의 시련이 안타깝다. 미얀마를 보며 보편적이지만 거저 주어지지 않은 인권과 민주주의 가치의 소중함을 느끼게 된다. 미얀마의 30년 민주화 운동이 헛되지 않기를 기대해 본다.<뉴스1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