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카피캣'의 고백…"유혹에 넘어갔다"
[기자의 눈]'카피캣'의 고백…"유혹에 넘어갔다"
  • 신평택신문
  • 승인 2019.12.09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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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환 기자© 뉴스1


(서울=뉴스1) 이승환 기자 = "모든 (카피) 상품 판매를 중단했습니다. 영세 자영업자다 보니 (카피) 유혹에 넘어갔던 것 같습니다."

국내 패션 브랜드 A사 대표는 지난달 27일 기자의 휴대전화에 이 같은 메시지를 보냈다. 본보가 A사 맨투맨·후드티의 디자인 도용(카피) 의혹을 보도한 직후였다. (관련 기사:http://news1.kr/articles/?3777911)

A사 제품들이 의류 브랜드 '캄퍼씨'의 후드티 디자인을 베꼈다는 의혹이었다. 이에 대해 A사 대표는 "유혹에 넘어갔다"고 솔직하게 시인한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그는 '비교적' 양심적인 편이다. 상당 수 디자이너·브랜드 대표는 디자인 도용을 잘 인정하지 않는다. "카피하지 않았고 참고(參考)만 했다"고 강변한다. '억지'를 부릴 수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카피 기준이 모호해서다. 어디까지가 디자인 도용이고 '참고'인지 명확한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법대로 한번 해보자'고 결심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법원도 '기준 모호'를 이유로 결론 내기를 주저한다. 일종의 합의 개념인 '조정'을 소송 당사자에 제안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게다가 소송 결과가 나오는 데 최소 1년. 항소와 상고 절차가 진행되면 보통 3년 이상 걸린다. 그 사이 원작자의 디자인은 제대로 보호받지 못한다. 소송비용도 최소 1000만원이다. 국내 패션 산업 사업체 가운데 큰 비중을 차지하는 1인 디자이너 브랜드에는 소송비용이 부담 그 자체다.

 

 

 

 

 

구찌 가죽 항공 재킷(왼쪽),과 포에버21의 메탈릭 인조가죽 항공 재킷. 포에버21 제품이 구찌 제품 디자인을 도용했다는 논란에 휩싸였다. 가격은 왼쪽 구찌 제품이 3600달러(약 420만원), 오른쪽 포에버21 제품이 34.90달러(약 4만원)다.© News1 김일환 디자이너

 

 


국내외 패션가의 디자인 도용 문제를 다룬 기획 시리즈 '카피 제국'을 준비하면서 한 가지 만큼은 절감할 수 있었다. 카피 문제는 법대로 해결하기 어렵다는 것. 실제로 패션계는 '법' 대신 '중재·조정 기구'를 외친다. 디자인 도용 분쟁을 전담해 몇 개월 안에 신속하게 처리하는 중재·조정 기구기 필요하다는 요구다.

정부 산하기관이든 민간단체든 중재·조정기구를 만들려면 한 가지 뒷받침돼야 할 게 있다. '정부 지원'이다. 디자인 도용 분쟁 관련 최고 전문 법률가로 꼽히는 이재경 한국패션디자이너연합회 운영위원(변호사)는 "조정·중재 기구 설립에는 이른바 '돈'이 들어간다"며 "정부 지원이 불가피한 작업"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이 대목에서 "또 예산 달라는 거냐"고 한숨 짓는 공무원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관련 예산이 없어도 너무 없다. 사실상 '제로' 수준이다. 그나마 서울시가 올해 예산 '1억원'을 확보해 디자인 보호 사업을 하고 있지만 이마저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러는 사이 서울시청에서 불과 2.7㎞ 떨어진 동대문 쇼핑가에서는 '카피상품'이 사실상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은 채 유통되고 있다.

무엇보다 카피 상품은 중소·영세 업체의 생존을 위협한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업체 대표들은 "'카피 상품'이 유통되자 매출이 두 자릿수 퍼센트로 줄었다"고 입을 모았다. 카피 상품을 두고 소송을 비롯한 분쟁이 시작되면 정상적인 영업이 불가능하다고 호소한다.

이들의 손실은 패션계 전반의 경쟁력 약화를 초래한다. 'K-패션'의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해서는 정부 좀더 의지를 가지고 '카피 근절'에 대응해야 할 때다. 신진 디자이너를 발굴하고 1인 패션 기업을 육성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카피 상품을 근절해 아이디어를 보호받을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드는 것이 더 지속가능한 방법이다. 서울시뿐 아니라 중소벤처기업부와 산업통상자원부도 한번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